스패드 전투기 (SPAD)

개요

조르쥬 기느메르(Georges Guynemer)의 41번째 격추를 묘사한 항공화.

프랑스의 SPAD사에서 제작한 1인승 복엽 전투기인 스패드 전투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지녔었던 고성능 전투기로써, 당시 프랑스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뉴포르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서 배치된 신예기였다. (비공식 기록이긴 하지만 세계 최고의 속도는 이미 1914년, 영국의 S.E.4 정찰기가 달성한 214km/h였기 때문에, 양산 전투기들 중에서 가장 빨랐었다고 보는게 알맞다)  

좁은 선회각으로 빠르게 선회할 수 있는 항공기가 1차 세계대전의 제공권을 장악했을 것이라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프랑스군의 스패드 전투기는 공중전이라고 불리우는 생소한 전투가 발생한지 1년만에, 더 빠른 속도와 더 강력한 상승률을 지닌 고속 항공기들이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동시대의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서 무척 둔한 기동성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스패드 전투기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독일군 항공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들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 조종사들은 항상 전투의 주도권을 지닌 채 작전에 임할 수 있었다. (BMW 엔진을 장착한 포커 D.VIIF 전투기만이 스패드 전투기를 속도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 전투기 덕분에 프랑스 공군은 서부전선의 제공권을 재탈환할 수 있었고, 뛰어난 성능을 바탕으로 연합군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인 르네 퐁크와 미국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인 에디 리켄베커, 그리고 이탈리아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인 프란체스코 바라카 등등 수많은 에이스 조종사들을 탄생시켰기에 명실공히 연합군 최강의 전투기들 중 하나로 당당히 인식되고 있다.

성능 (SPAD S.XIII 기준)

 

– 최고 속도 : 218 km/h (135 mph, 2000m 고도에서)
– 실용 상승 한도 : 6,650 m (21,815 ft)
– 상승률 : 2 m/s (384 ft/min)

 

개발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에디 리켄베커(Eddie Rickenbacker)가 조종한 SPAD S.XIII 전투기의 전체도.
당시에 사용된 미군기의 국적 식별 기호는 우리에게 익숙한 별 모양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와 비슷한 모양을 사용했었다.(동그란 모양에 삼색기의 색을 배치해서 만든 국적 마크는 프랑스가 최초이며 나중에 영국도 이와 비슷한 모양의 국적 마크를 채용했다)(에디 리켄베커의 총 격추수는 26대)

SPAD S.VII (S.7)

53기의 격추기록을 가지고있는 에이스 조종사이자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조르쥬 기느메르의 스패드 S.VII 전투기.
동체 측면에 그려진 황새는 3전투 비행중대의 마스코트이며, ‘Le Vieux Charles‘라는 문구는 기느메르가 자신의 항공기에 종종 새겨넣었던 글이다. 새겨진 글의 뜻은 늙은 찰스 또는 오래된 찰스(Old Charles)라는 뜻인데, 왜 이런 글귀를 써넣었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항공기에 들어가는 부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엔진이 가장 중요하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지만, 항공기 기술이 걸음마 수준이었던, 초창기 항공기들은 특히나 많은 부분을 엔진의 성능에 의지했었고, 탑재된 엔진의 성능이 나쁘다는 것은 해당 항공기의 전체적인 성능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프랑스 최고의 전투기로 평가받는 스패드 전투기 또한 탑재된 엔진의 성능에 많이 의존한 편이었으며, 스패드 전투기의 성능이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위스의 기술자였던 마크 비르키트(Marc Birkigt)가 제작한 이스파노-수이자(Hispano-Suiza) 엔진 덕분이었다.

마크 비르키트는 예전에 자동차용으로 제작되었던, 이스파노-수이자 V8 엔진을 바탕으로 1915년 2월에 새로운 항공기용 엔진을 만들었는데, 이 엔진은 330 파운드의 출력을 지닌데다가 1,400 RPM에서 140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졌었다. 1915년에 제작된 엔진 치고는 정말 엄청난 성능을 지닌 엔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크 비르키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1915년 7월에 110 kW(150 마력)의 출력을 뽑아낼 수 있는 개선된 이스파노-수이자 8A 엔진을 만들면서 프랑스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프랑스 공군의 지휘부는 마크 비르키트가 제작한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곤, 자국의 항공기 제조 업체들에게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을 탑재한 고성능 전투기를 제작해 달라고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SPAD(Société Pour L’Aviation et ses Dérivés )사의 수석 디자이너인 루이스 브차레로(Louis Béchereau)가 SPAD A.2 Pulpit 2인승 전투기를 토대로 설계한 신형 전투기를 단기간에 제작하면서 1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투기중 하나인 스패드 전투기가 탄생하게 된다. 브차레로가 설계한 신형 전투기는 SPAD V (SPAD 5) 라는 명칭으로 제작되었으며, 2인승 항공기였던 펄핏 전투기를 1인승 전투기로 변형시키는 방향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크기가 줄어들었을 뿐 대부분의 설계방식은 펄핏 전투기와 비슷한 설계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설계방식이 동일했던 만큼, 스패드 V 전투기의 주익은, 펄핏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지지대가 하나의 구역을 차지하는 싱글-베이 방식으로 제작됐지만, 독특하게도 지지대 사이의 중앙부에 비교적 가벼운 지지대가 추가로 설치되면서 주익의 내구성이 크게 증가되었다. 이 새로운 지지대의 접합부에는 플라잉 와이어와 랜딩 와이어가 설치된 덕분에 비행시 발생하는 진동과 항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와이어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삭구 작업(rigging)도 비교적 간소화 되는 등 여러가지 이점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동체 구조 또한 펄핏 전투기와 동일하게, 나무로 제작된 뼈대를 캔버스 천으로 감싸는 트러스 구조로 제작되었고, 엔진이 자리잡은 조종석 앞쪽은 강판으로 덮어서 미약하게나마 조종사와 엔진을 총탄으로부터 보호했다. 초창기에는 펄핏 전투기와 동일하게 둥근 모양의 커다란 스피너가 장착됐었지만,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면서 냉각효율이 나빠졌기 때문에 개발과정에서 제거되었다. 이로 인해서 스패드 전투기의 외형은 마치 공랭식 엔진을 사용하는 항공기처럼 변해버렸다.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은 수냉식(water-cooled) 엔진이었다)

싱글 베이(Single-Bay) 항공기와 투 베이(Two-Bay) 항공기의 모습. 위에 있는 그림이 싱글 베이 방식을 사용한 항공기이고, 아래에 있는 그림이 투 베이 방식을 사용한 항공기이다. 스패드 전투기의 경우에는 싱글 베이의 중앙에 얇은 지지대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얼핏보면 투 베이 방식을 사용한 항공기처럼 보였다.

스패드 전투기의 무장으로는 동조장치에 연결된 7.7mm 구경의 빅커즈 기관총 한 정이 엔진 위에 설치되었다.
특이한 점으로는, 조종석 앞쪽의 탄약통에 감겨있던 탄띠들이 조종석 좌측에있는 탄약통으로 감기면서 탄피들을 모두 회수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었는데, 이와같은 복잡한 급탄 방식 때문에 탄걸림 현상이 유난히 잦았다고 한다. 하지만, 격발 후 탄띠가 분리되는프리도(Prideaux) 탄띠로 교체된 후로는 이 탄걸림 문제가 사라졌다고 한다.

격발 후 탄띠가 분리되는 프리도 탄띠의 모습.

스패드 전투기의 탄약통들.

조종석 앞쪽에 감겨있던 탄띠들이 기관총을 거쳐서 조종석 좌측에있는 탄약통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탄피가 기체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모두 회수된다. (후기형에서는 탄피를 기체 밖으로 배출하는 식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패드 V 전투기의 첫 시제기는, 1916년 4월에 스패드 항공사의 시험 조종사였던 브케(Bequet)에 의해서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첫 비행에서 드러난 시제기의 성능은 프랑스 공군에게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시제기의 최고속도는 192 km/h(119 mph)로써 당시 기준으로서는 정말 엄청나게 빠른 항공기였고, 4.5분만에 고도 2,000 미터(6,500 ft)까지 도달하는 뛰어난 상승률을 지닌 것은 물론, 튼튼한 구조로 설계된 주익 덕분에 강하 부문에서도 놀랍도록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항공 기술자들과 조종사들은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항공기가 공중전에서 우세를 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공기의 기동성을 향상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당시 전투기들은 아랫 날개가 윗 날개 너비의 절반 이하의 면적을 지닌 일엽반기(sesquiplane)의 형태로 제작되곤 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아랫 날개의 너비가 줄어듬에 따라 지지대의 지지점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급강하 기동시 주익의 지지대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로 인해서 당시 프랑스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뉴포르 전투기와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알바트로스 전투기는 급강하 기동을 최대한 자제했어야 했는데, 루이 브차레로의 스패드 전투기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기동성 보다는, 고속성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주익이 비교적 많은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위, 아래 날개의 너비가 동일하게 제작된데다가 얇은 지지대가 추가적으로 설치된 덕분에 내구성이 무척 튼튼해져서 급강하 기동을 매우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강하 성능이 아무리 좋아봤자 태생이 나무와 천으로 이루어진 복엽기였던 만큼, 고만 고만한 수준이었을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강시 400 km/h (249 mph)까지 가속하는게 가능했다고 하니, 독일 전투기들의 입장에서는 스패드 전투기의 꼬리를 물었다 할지라도 하강 기동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물론, 400 km/h까지 가속을 하는 것은 엄청난 강심장을 지닌 소수의 조종사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냥 단순히 하강기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빠른 속도로 하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전장을 무사히 이탈할 수 있었다. (조종사들은 스패드 전투기의 빠른 속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바람 보다도 빠른 전투기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빠른 속도와 뛰어난 상승률, 그리고 다른 항공기들이 지니지 못한 강력한 강하성능 덕분에 스패드 전투기는 독일군의 전투기들보다 좋은 위치를 선점해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고, 만약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면, 단순한 하강 기동만으로도 위험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전투의 주도권은 늘상 스패드 전투기에게 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일선의 몇몇 조종사들은 스패드 전투기 특유의 고속성을 눈여겨 보기 보다는 시제기의 기동성이 엄청나게 둔하다는 점에 더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이제껏 기동성이 뛰어난 뉴포르 전투기를 조종해왔기 때문에 빠른 속도 보다는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항공기가 공중전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를 활용한 교전 방법에도 익숙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의 둔한 기동성에 굉장히 큰 유감을 표했었다. 이 문제는 특히, 뉴포르 전투기의 뛰어난 기동성으로 독일군 전투기들을 제압해 나갔던 베테랑 조종사들에게서 심하게 나타났었는데,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들 중 한 명이었던 샤를 누인기세는 기동성이 둔한 스패드 전투기를 굉장히 싫어해서 탑승을 거부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몇몇 베테랑 조종사들의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군은 1916년 5월 10일에 SPAD VII C.1(SPAD 7 C.1)이라는 명칭으로 268대를 도입하기로 결정했고, 이어서 모든 뉴포르 전투기들을 스패드 전투기로 대체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게된다. (C.1이라는 명칭은 프랑스어로 avion de chasse의 줄임말이며, 1인승 전투기를 뜻한다)

하지만, 초도에 도입된 스패드 VII 전투기를 인도받아서 운용해본 프랑스 공군은 몇가지 심각한 결함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주로 이스파노-수이자 엔진과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날씨가 더운 계절에는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졌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운용하기가 곤란했고, 반대로 날씨가 추운 계절에는 엔진이 충분히 따뜻해지질 않아서 시동 조차 걸리지 않는 상황이 속출했기에 정상적으로 운용하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자동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엔진은 워밍업(Warm Up)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 정상온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엔진을 무리하게 가동한다면, 엔진이 제 성능을 내지 못하는건 물론이고 엔진의 수명이 굉장히 짧아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패드사의 기술진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힘들었기 때문에 스패드 VII 전투기의 본격적인 배치는 점점 늦어졌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던 일선의 정비공들은 임시방편으로 다양한 야전 개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곤 했는데, 엔진의 과열을 막고자 기수 앞부분의 강판에 여러개의 크고 작은 구멍을 뚫어서 엔진에 유입되는 공기의 양을 늘렸고, 이마저도 안된다면 카울링 일부분을 철사망으로 대체하거나 아예 떼어버리는 등 엔진에 유입되는 공기의 양을 최대한으로 늘려서 엔진의 열을 식히려했다. 군에 인도된 항공기들만으로 해결을 봐야했었던 일선의 정비공들과는 달리, 항공기를 생산하고있던 스패드 항공사의 기술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롭게 생산되는 스패드 VII 전투기들의 엔진 카울링을 최대한 많이 개방된 형태로 제작해서 과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 방법은 과열 현상을 막을 수는 있었어도 겨울철에 차갑게 식어버리는 엔진의 열을 보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수직으로 열리고 닫히는 개폐장치를 기수 앞쪽에 장착해서 온도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했다. 이외에도 엔진의 내구성이 취약하다는 평가도 나왔기 때문에 스패드사와 엔진의 제작자인 마크 비르키트는 엔진의 구조를 보강하는 작업을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참고 – http://riseofflight.com/Forum/viewtopic.php?f=49&t=22819&p=302497&hilit=spad+7#p302497)

1차 세계대전을 바탕으로 제작된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라이즈 오브 플라이트’에서 구현된 스패드 S.13 전투기의 모습.
왼쪽이 라디에이터를 모두 닫은 상태이고 오른쪽이 라디에이터를 완전히 개방한 상태이다. 게임상에서 겨울이 아닌 맵에서는 라디에이터를 모두 개방하고 있어도 엔진이 항상 뜨겁게 달아올라있기 때문에 항상 온도계를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고고도로 올라가면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지기 때문에 이 때는 라디에이터를 닫아줘야 한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인해서 1916년 9월에 배치된 스패드 전투기의 숫자는 프랑스 공군이 주문한 수량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 소수의 기체들만이 겨우 겨우 배치될 수 있었고, 1917년 1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운용해볼 수 있는 수량이 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다.

초기에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자, 이번에는 프랑스 공군이 요청한 많은 수의 스패드 전투기들을 생산하는데 문제를 겪었기 때문에 스패드사는 여러 항공업체들의 도움을 받아서 생산 수량을 메꾸어야했다. Grémont, Janoir, Kellner et Fils, de Marçay, Société d’Etudes Aéronautiques, Régy, Sommer 등의 많은 업체들이 스패드 VII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해서 전력화를 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7년 2월에 배치된 스패드 전투기들은 작년 5월에 도입하기로 했었던 수량을 겨우 채운 268대 뿐이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7년이 되자, 스패드 VII 전투기는 새롭게 등장한 독일 공군의 신형 전투기들 때문에 성능상으로 우위를 가지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때문에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조르쥬 기느메르는 스패드 전투기의 개발자인 루이스 브차레로를 찾아가 150 마력의 스패드 전투기로는 독일군의 할버스타트 전투기를 따라 잡을 수 없으니, 더 빠른 전투기를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때마침 비르키트가 180마력의 출력으로 강화시킨 이스파노-수이자 8Ab 엔진의 개발에 성공한 상태였던 덕분에 브차레로는 스패드 VII 전투기의 동체에 180 마력의 엔진을 장착시킨 신형기를 내놓게된다. 180마력의 엔진이 장착된 신형 스패드 VII 전투기는 최고 속도가 192 km/h (119 mph)에서 208 km/h (129 mph)로 증가했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들의 심장은 전부 이스파노-수이자 8Ab 엔진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1917년 4월 이후에 생산된 스패드 전투기들도 모두 8Ab 엔진을 장착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브차레로는, 220 마력으로 출력이 올라간 신형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을 장착시킨 S.XII 전투기와 S.XIII 전투기를 개발해서 스패드 전투기의 성능을 꾸준히 향상시키게 된다.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의 수급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엔진들을 장착한 스패드 전투기들도 많았지만, 전부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에 비해서는 모자란 성능을 보여주었던 탓에 실험적으로 소수만 생산되는데 그쳤다)

메소포타미아에 배치된 30 비행중대의 스패드 전투기.

뉴포르 전투기가 그랬던 것처럼 스패드 VII 전투기 또한 여러나라에서 도입되었는데, 신형기의 보급에 애를 먹고있던 영국군은 스패드 전투기를 운용하기 위해서 프랑스로부터 일부 수량을 구입하거나 자체적으로 생산 시설을 만들어서 라이센스 생산하는 등 스패드 전투기의 전력화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라이센스 생산된 스패드 전투기들은 대부분 품질이 좋지 않았었고, 프랑스에서 조차 스패드 전투기의 수급에 애를 먹고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스패드 전투기를 대규모로 운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에서도 뛰어난 성능을 지닌 신형기들이 속속 등장한 덕분에 영국군은 수급이 어려운 스패드 전투기 보다는 자국의 신형 항공기들을 주력으로 운용해나갔다.

영국에서 운용된 스패드 전투기들은 서부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고있던 영국 육군 항공대 소속의 19, 23 비행대대와 메소포타미아에 배치되었던 30 비행대대에서 운용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생산된 모델들이 더 신뢰성이 높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부전선에 배치된 영국군 소속의 스패드 전투기들은 전부 프랑스에서 생산한 모델들을 사용했다고 하며, 자국에서 생산한 모델들은 영국 본토에서 훈련용으로 사용하거나 중동에 배치되어있는 훈련단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19 비행대대와 23 비행대대는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이 되어서야 영국의 신형 전투기로 기종전환을 할 수 있었는데, 19 비행대대는 1918년 1월에 스패드 VII 전투기를 솝위드 돌핀 전투기로 대체했으며, 23 비행대대는 조금 늦은 4월달이 되어서야 돌핀 전투기로 교체할 수 있었다. 때문에 23 비행대대는 서부전선에서 스패드 VII 전투기를 마지막으로 운용한 비행대대가 되었다.

최우방국인 영국외에도 스패드 전투기는 전쟁내내 러시아와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 등 굉장히 많은 국가에서 운용되었다. 러시아는 1917년 봄에 43대의 스패드 전투기를 수령해서 운용했고 나중에는 덕스(Dux) 공장에서 100여대의 스패드 VII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하기도했지만, 엔진을 비롯한 여러 자재들의 품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성능이 나빴다고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이탈리아 또한 스패드 전투기를 운용한 나라로써 1917년 3월에 9개의 비행중대에서 스패드 VII 전투기를 운용했지만, 이탈리아군의 조종사들 또한 프랑스의 조종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동성이 뛰어난 뉴포르 24/27 전투기나 Hanriot HD.1 전투기를 선호했었기 때문에 주력으로는 운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프란체스코 바라카(Francesco Baracca)는 신형 스패드 전투기를 굉장히 좋아했었다고 하며, 그가 조종했었던 스패드 전투기는 오늘 날까지 이탈리아의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있기 때문에 소수의 조종사들은 스패드 전투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 봤던 것 같다.

1917년에 참전한 미국 또한 189대의 스패드 VII 전투기를 도입해서 사용했었다. 1917년 12월, 미육군 항공대에 처음으로 배치되었지만, 실전에 투입되기 보다는, 앞으로 등장한 신형기인 XIII 전투기를 대비하는 용도로써 대부분 훈련용으로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야스타 38 소속의 스패드 VII 전투기. 국적 식별 기호만 독일 것으로 바꾸었을 뿐 포획되기 전에 사용된 프랑스 공군 소속 N31 비행중대(Escadrille N31)의 문양을 그대로 사용하고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신기하게도 스패드 VII 전투기를 운용한 국가들 중에는 적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몇몇 스패드 VII 전투기를 포획해서 훈련용으로 사용하거나 전투용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독일 공군이 사용한 스패드 전투기의 격추 전과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벨기에 또한 스패드 VII 전투기를 소수 운용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브라질,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그리스, 일본, 네덜란드, 페루, 폴란드, 포르투갈, 루마니아, 샴(태국), 유고슬라비아 등등 많은 나라에서 운용되었다고 한다.

스패드 VII 전투기의 총 생산량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3,825대에서 5,600여대 정도가 프랑스에서 생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220대는 영국에서, 100대는 러시아에서 생산되었다.

SPAD S.XII (S.12)

미육군 항공대 소속, 찰스 J. 비들(Charles J. Biddle) 대위의 스패드 S.XII 전투기. 스패드 VII 전투기에 비해서 기수의 길이가 길어졌으며, 한 정의 빅커즈 기관총과 함께 37mm 포가 프로펠러 축 안에 장착되었다. (기관포(Auto Cannon)가 아닌 대포(Cannon)이기 때문에 한 발 쏘고 나면 조종사가 직접 재장전해야 했다)

스패드 XII 전투기는 프랑스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조르쥬 귀느메르가 1인승 항공기에 37mm 대포를 장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만들어졌다. 37mm 포를 장착시킨다는게 말이야 간단하지만, 항공기를 구성하는 자재들이 대부분 나무나 천을 이용해서 만들어졌었던 시기였고, 사용되던 엔진들도 대부분 출력이 굉장히 낮았었기 때문에 37mm포 처럼 무겁고 반동이 강한 무장은 날렵한 기동력과 빠른 속도를 지녀야하는 소형 항공기에겐 알맞지 않은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굳이 항공기에서 포를 운용하고 싶다면 Voisin III와 같은 2인승 항공기에서나 사용이 가능한 처지였다.

그러나 새롭게 개발된 220 마력의 강력한 엔진 출력과 스패드 전투기의 튼튼한 동체 디자인을 이용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고 생각되었는지 스패드 전투기의 개발자였던 브차레로는 스패드 VII 전투기의 설계를 이용해서 스패드 S.XII 전투기를 개발하게 된다.

스패드 XII 전투기는 37mm 포를 사용해야했기 때문에 주로 기체의 내구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일단 동체의 길이와 날개 면적이 늘어났고, 윗 날개의 위치를 살짝 앞으로 이동시키면서 날개 끝 모양을 둥글게 바꾸는 등 기체 구조가 살짝 변했다. 그리고 스패드 XII 전투기의 독특한 무장인 37mm 포는 전선에서 널리 쓰이고 있던 호치키스(Hotchkiss) 포 대신 뿌띄(Puteaux)사에서 제작한 반자동 모터 캐논인 SAMC(Semi Automatique Moteur Canon)가 사용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이스파노 수이자 엔진의 구동 축 안에 장착되었다고 하며 총 12발의 포탄을 장비했다고 한다. 크기가 커진데다가 한 정의 7.7mm 빅커즈 기관총이 여전히 기수에 장착되어있었기 때문에 스패드 XII 전투기의 중량은 스패드 7 전투기 보다 87kg 이나 더 무거워졌다. (스패드 7의 중량은 500kg이고 스패드 12의 중량은 587kg)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의 사진.
엔진 회전 축 안에 37mm 포를 넣기 위해서 약간의 개량을 거쳤다고 하며 출력이 더욱 강화된 220 마력의 이스파노-수이자 8Cb 엔진이 사용되었다. 이 방법을 사용한 덕분에 스패드 12 전투기의 37mm 포는 프로펠러 날의 방해 없이 전방으로 발사하는게 가능했다.

엔진 구동축 내부에 포를 넣는 기술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서는 기느메르가 직접 스패드 12 전투기의 시험 비행을 실시했다고 하며, 여기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느메르처럼 뛰어난 조종실력을 가졌던 소수의 조종사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스패드 12 전투기를 운용해야했었던 일반 조종사들에게는 조종하기가 영 까다로운 전투기였다고 한다. 탄속이 느렸던 만큼, 포를 조준하고 발사하는 과정이 어려웠다고 하며, 발사하고 난 후에는 조종사가 직접 재장전을 해야했기 때문에 격렬한 공중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사용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게다가 발사 직후에는 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약 연기가 조종석을 가득 채우는 문제도 있었고, 약실이 조종석 내부에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종간을 움직이기가 불편한 것은 물론, 기존에 사용되던 막대기 모양의 조종간이 아닌, 자동차 핸들 모양의 조종간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에 익숙치 않은 조종사들은 조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원래의 조종간 방식으로 되돌아갔지만 이외의 단점들은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개선시키기가 어려웠다.

로맹 위고의 만화 Le Pilote à l’Edelweiss 에서 등장하는 스패드 S.XII 전투기의 모습.
자동차 손잡이처럼 제작된 조종간 아래에 약실이 배치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엔진축에 장착된 37mm 기관포의 관리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별도의 마개를 장착해서 보관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격발 후 뿜어져 나오는 화약에 대해서 주인공이 불평하자,
이 기체는 오직 뛰어난 에이스 조종사만을 위한 항공기라며 무마하는 브차레로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답지않게 엄청난 화력을 지녔던 스패드 12 전투기였지만, 프랑스 당국은 기존의 스패드 7 전투기와 신형 스패드 13 전투기를 우선적으로 생산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소량만 생산되었다고 하며, 당초에 계획된 300대의 생산계획을 모두 채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스패드 12 전투기를 집중적으로 운용한 비행중대는 없었다고 하며, 소수의 스패드 12 전투기들만이 르네 퐁크(Rene Fonck), 리오넬 드 마미에르(Lionel de Marmier), 페르낭 앙리 샤반(Fernand Henri Chavannes), 앙리 에이 드 슬레이드(Henri Hay de Slade), 알베르트 들랑(Albert Deullin), 프랑소아 바테스티(François Battesti) 등의 실력있는 에이스 조종사들에게만 지급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극소수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공군에서도 각 비행대에 몇 대 씩만 배치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등등 여러나라에 수출되어서 운용되었다고 한다.

SPAD S.XIII(S.13)

마치 붉은 남작을 연상케하는, Spa38 비행중대 (Escadrille Spa38) 소속, 조르쥬 펠릭스 매든(Georges Felix Madon) 중위의 스패드 13 전투기. 공식 격추 기록은 41대지만 미확인된 격추기록까지 합한다면 총 64대를 격추시켰을 거라고 추정한다. 동체를 붉게 칠한 이유는 편대원들이 자신의 위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는데, 무선 통신이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오직 조종사의 두 눈으로만 동료기의 위치를 알아내야했기 때문에 교전상황에서 적기와 싸우다 보면 아군기의 위치를 놓치고 편대에서 낙오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었다.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체를 눈에 띄기 쉽게 붉은색으로 칠해 부하들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적기에게도 발견되기 쉬웠던 만큼, 어지간한 담력이 뒤따르지 않는 이상 이처럼 행동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스패드 13 전투기만의 독특한 성능 중 하나는 조종석 좌측 아래에 사진 촬영 임무를 위한 카메라를 장착하거나 작은 폭탄들을 수납할 수 있는 랙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수납해야하는 크기가 작다보니,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를 장착하기가 힘들어서 정찰 임무 대신 폭격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고 한다)


스패드 S.XIII
 전투기 역시, 프랑스군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조르쥬 귀느메르가 루이스 브차레로에게 찾아가 독일기를 압도할 수 있는 신형기를 제작해달라는 요구에 브차레로가 개발한 스패드 시리즈의 새로운 후기형이었다. 새롭게 개발된 이스파노-수이자의 신형 엔진 덕분에 무장 탑재면에서 어느정도 여유가 생기자 처음에는 37mm 포를 장착한 S.XII 전투기를 개발했었지만, 전투기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과한 무장임을 깨닫고 동시기에 제작되던 다른 항공기들처럼 두 정의 기관총을 표준으로 탑재하는 것을 목표로 제작되었다.

S.VII 전투기의 설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무거운 빅커즈 기관총 두 정을 장착하기 위해서 기수부분이 개수됨과 동시에 전체적인 크기도 늘어났다. (빅커즈 기관총에는 각각 400발의 탄알이 장전되었다) 이외에도 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는 공간이 조종석 좌측 아래에 마련되었고, 기존의 방풍창 대신 간소해진 모양의 새로운 방풍창이 장착되는 등 소소한 변화들도 새롭게 생겨났다.

초기에는 150 kW(200 마력) 출력을 지닌 이스파노-수이자 8Ba 엔진이 장착되었지만, 나중에 160kW(220 마력) 출력으로 향상된 8Bc 엔진과 8Be 엔진이 등장한 덕분에 S.XIII 전투기의 성능이 전반적인 크게 향상되었다. 새로운 엔진들을 장착한 스패드 XIII 전투기는 영국의 명 전투기인 솝위드 카멜 전투기나 독일 최고의 전투기인 Fokker D.VII 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하며, 두 항공기에 비해서 추력비도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상승률도 무척이나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동시대의 전투기들 보다 기동력이 둔했기 때문에 근접 전투 상황에서는 매우 불리한 편이었고, 저속 비행성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스패드 XIII 전투기로 착륙하려면 엔진을 킨 상태로 착륙해야했다고 한다. 현대의 항공기들은 착륙할 때도 엔진을 키고 있는게 당연한 일이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만들어진 항공기들은 속도를 줄일 수 있는 플랩이나 에어포일과 같은 감속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엔진을 킨 상태에서 착륙한다는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이해가 잘 안된다면, 브레이크 페달이 없는 자동차로 1단 기어를 넣은 채 주차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S.E.5a 전투기를 비롯한 동시기의 여러 항공기들은 속력을 줄이고자 엔진을 끈 상태로 착륙하곤 했었는데, 스패드 전투기는 엔진 시동이 걸린 상태에서 착륙해야했기 때문에 다른 항공기에 비해서 비교적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엔진을 키고 있으나 끄고 있으나 착륙하기 어려웠던건 매한가지였다)

이외에도, 톱니바퀴 버전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은 신뢰성이 매우 낮기로 유명했는데, 품질이 나쁜 윤활유와 엔진 자체의 진동 때문에 수명이 더욱 단축되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프랑스 공군은 1917년 11월부터 전력에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심지어 1918년 4월에 보고된 보고서에는 200마력 출력의 엔진을 사용하는 스패드 XIII 전투기들 중에서 3분의 2에 해당되는 항공기의 엔진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동안 운용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동률과 신뢰성이 엉망진창이었던 셈이다.

프랑스 공군에서 사용되던 스패드 전투기들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미육군 항공대에 도입된 스패드 XIII 전투기에서도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우방국인 자기들에게는 질 나쁜 엔진이 장착된 항공기만 보내주고 프랑스는 잘 만들어진 엔진만 사용한다며 오해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고, 영국군의 경우엔 아예 자국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엔진이 탑재된 스패드 전투기들은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고, 후방의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훈련용으로만 사용했다고 한다. 엔진의 신뢰성 문제로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시간이 흘러갈 수록 이스파노 수이자 엔진이 계속 개량된 덕분에 위와 같은 문제는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1차대전의 막바지였던 몇 달 동안 미군은 부족한 빅커즈 기관총의 수량에 불안감을 느끼고 자국의 멀린 기관총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는데, 이 덕분에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군이 사용한 항공기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항공기들이 멀린 기관총이 장착된 상태로 운용되었다.

프랑스 공군은 2,230 대의 S.XIII 전투기를 도입해서 서부전선의 제공권을 장악하려했지만, S.VII 전투기가 그랬던 것처럼 배치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당초에 계획했던 수량에서 절반에도 못미치는 764대의 스패드 전투기들만이 1918년 3월에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프랑스 공군의 모든 비행대대들이 스패드 XIII 전투기로 완전히 무장하게 될 정도로 배치수가 증가되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총 74개의 비행중대들이 S.XIII 전투기로 무장되었다고 하며, 1923년까지 프랑스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꾸준히 운용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더욱 개선된 220 kW (300 마력)의 이스파노-수이자 8F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이 엔진은 S.XIII 전투기 이외에도 새로운 신형기인 SPAD S.XX(SPAD S.20)전투기와 뉴포르사의 뉴포르 29 전투기, 그리고 영국의 솝위드 돌핀 II 전투기 등에 사용되었다.

전장에선?

아르망 드 튀렌느(Armand de Turenne) 대위의 스패드 S.VII 전투기.
수탉 그림으로 유명한 SPA 48 비행중대 소속이며, 총 15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하늘에서 벌어지던 항공기들간의 생소한 전투는 점점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병기인, 전투기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지 이제 막 1년이 지났을 무렵, 프랑스 공군은 스패드 S.VII 전투기의 빠른 속도가 공중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동성이 뛰어난 뉴포르 전투기 대신, 고속 비행이 가능한 스패드 전투기를 주력으로 삼고자 1916년 5월 10일에 268대의 스패드 전투기를 S.VII란 명칭으로 발주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에 납품된 스패드 전투기들은 엔진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공군은 어쩔 수 없이 스패드 전투기의 배치를 잠시 지연시켜야했고, 이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뉴포르 전투기를 주력으로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 까닭에 스패드 전투기의 배치기간은 점점 늦어졌지만, 스패드 전투기가 서부전선에 막 배치되던 기간에는 프랑스군의 뉴포르 11/17 전투기와 영국군의 Airco DH.2 전투기가 독일 공군의 포커 아인데커 전투기를 무차별적으로 격추시키면서 제공권을 완전히 되찾았던 시기였기에 스패드 전투기의 배치기간이 조금 늦어진다 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초기에 발생된 문제점들을 조금씩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소수의 스패드 전투기들이 계속 배치되었던 덕분에 1916년 8월 초 쯤에는 꽤 많은 수의 뉴포르 전투기들이 스패드 전투기로 대체된 상황이었다.

최초로 전선에 배치된 스패드 전투기는 S.112기로써, N.65 비행대 소속의 쏘바쥬 (Sauvage) 중위가 조종했다고 하며, 이어서 도착한 S.113기는 이미 15대의 공인 격추기록을 가지고 있는 N.3 비행대 소속의 조르쥬 귀느메르가 조종했다고 한다. 쟁쟁한 실력을 갖춘 베테랑 조종사들에게만, 지급되기 시작한 스패드 전투기였지만 막상 스패드 전투기로 첫 격추 기록을 세운 조종사는 N.26 비행대 소속의 아몽드 팡사르(Armand Pinsard)였으며, 1916년 8월 26일에 S.122기로 독일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한다. (위키디피아에는 8월 26일에 첫 격추를 달성했다고 써놨지만, 1차 세계대전 조종사들의 격추 기록을 모아놓은 http://www.theaerodrome.com에 나와있는 자료에서는 1916년 11월에 첫 격추를 달성했다고 나와있네요… 정확히 어떤 기종을 격추시켰는지는 못 찾았습니다) (아몽드 팡사르의 첫 격추였으며 이후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7대의 적기들을 격추시켰다)

하지만, 1916년 말, 독일 육군 항공대의 신형기인 알바트로스 전투기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상황이 급박해져갔다. 당시 연합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뉴포르 11/17 전투기와 Airco DH.2 전투기들이 독일군의 알바트로스 전투기에게 일방적으로 격추당하기 시작하자 프랑스 공군은 알바트로스 전투기와 동등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스패드 전투기로 대항하려했지만,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스패드 전투기의 숫자는 너무나 적었으며, 초기에 발견된 결함들도 모두 해결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의 배치기간은 점점 더 지연되었다.

에른스트 우데트와 조르쥬 기느메르의 유명한 교전 일화를 표현한 항공화.
1차 세계대전의 기사도 정신을 대표하는 사건으로써, 기느메르의 스패드 전투기와 교전하던 우데트는 스팬다우 기관총이 고장났음을 알아채곤 약실에 걸린 탄알을 제거하고자 안간힘을 쓰고있었는데, 그 상황을 인지한 기느메르는 곧바로 교전을 중단한 뒤, 우데트에게 간단한 작별 인사를 남긴 채 그대로 전장을 이탈했다.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었지만, 기느메르의 선처 덕분에 에른스트 우데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슈투카와 메셔슈미츠 전투기를 도입하여 독일 공군의 재건에 앞장서게된다.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1916년 5월에 주문한 268대의 스패드 전투기들이 1917년 2월이 되어서야 겨우 겨우 배치된 상황이다 보니, 프랑스군은 뉴포르 전투기의 후기형들을 도입해서 스패드 전투기의 공백을 메꾸려했지만, 성능이 개선된 뉴포르 전투기의 후기형이라 할지라도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공군은 스패드 전투기의 전력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일선의 조종사들 또한 뉴포르 전투기 보다는 스패드 전투기가 알바트로스 전투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기로 판단했었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는 서서히 뉴포르 전투기를 대체하면서 프랑스군의 주력 전투기로 자리잡아갔다. 이중에서도 특히 스패드 전투기의 뛰어난 성능에 대해서 극찬했던 조종사는 프랑스 최고의 격추왕인 르네 퐁크(René Fonck)였는데, 공중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꿀 전투기라면서 스패드 전투기의 빠른 속도와 튼튼한 내구성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이며, 스패드 전투기로 75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제압할 수 있는 전투기로써, 스패드 전투기를 지목했던 반면, 샤를 누인기세(Charles Nungesser)를 포함한 몇몇 조종사들은 스패드 전투기의 등장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재빠른 선회로 적기의 꼬리를 잡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의 둔한 기동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고, 성능은 떨어질지라도 자신과 함께 무수한 역경을 헤쳐나왔던 뉴포르 전투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의 탑승을 거부했었다 . (신뢰성면에서는 뉴포르 전투기가 더 우수했다)

물론, 이와같은 결정을 내린 조종사들은,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있는 베테랑 조종사들이었기에 저성능의 뉴포르 전투기로도 충분히 적기들을 격추시켜나갈 수 있었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독일군의 신형기가 뉴포르 전투기의 성능을 완벽히 상회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이상 조종사의 실력만으로는 항공기의 성능차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졌다. 때문에 뉴포르 전투기를 고집하던 조종사들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스패드 전투기가 지닌 잠재 가능성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하나둘씩 스패드 전투기로 기종을 전환하여 새로운 전투 방식에 익숙해져갔다.

죽음의 기병 그림으로 유명한 샤를 누인기세의 스패드 S.XIII 전투기. 스패드 전투기를 거부했던 대표적인 조종사로써, 기동성이 뛰어난 뉴포르 전투기를 굉장히 좋아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가기 몇 달 전인 1918년 8월이 되어서야 스패드 S.13 전투기로 기종을 전환했다고 한다. 누인기세의 격추 기록은 총 43대로 르네 퐁크와 죠르쥬 기느메르의 뒤를 잇는 프랑스의 세번째 격추왕이었다. (독일군의 신형 전투기에 비해서 성능이 떨어지던 뉴포르 전투기로 1918년 중반까지 격추기록을 쌓아온 누인기세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극소수의 스패드 전투기들만 배치되어있었던 1917년 초반과는 달리, 중반부터는 스패드 전투기들의 출현이 잦아졌다. 초기에 발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대부분 해결된 덕분이었고, 여러 회사들이 스패드 VII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해준 덕분에 1917년 중반에는 500대의 스패드 전투기들이 전선에 배치될 수 있어서, 스패드 전투기는 전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종이 되었다.

스패드 전투기에게서 굳이 단점을 찾아보자면, 엔진의 신뢰성이 좋지 못했다는 점과 동시대의 전투기들 보다 둔했던 기동성, 그리고 기관총이 한 정 뿐이라 화력이 약했다는 것이다. 스패드 전투기가 막 개발되던 시기에는 기관총을 한 정만 장비하는게 전투기의 표준 무장이었지만, 배치 시기가 점점 늦어짐에 따라 스패드 전투기가 상대해야했던 새로운 전투기들은 두 정의 기관총을 표준으로 사용하고있었기 때문에 스패드 전투기의 화력은 독일 전투기들에 비해서 빈약한 편이었다.

때문에 일선의 조종사들은 스패드 7 전투기의 빈약한 화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루이스 기관총을 추가로 장착하기도 했다. 프랑스군의 조종사들은 프로펠러 날의 바깥쪽에 루이스 기관총을 배치해서 전방에 퍼부울 수 있는 화력을 강화시킨 반면, 영국의 조종사들은 적기의 배면 아래로 내려가서 위쪽으로 화력을 퍼부울 수 있게끔 루이스 기관총을 장착해서 화력을 강화했다. (중량이 늘어난 만큼, 항공기의 전반적인 성능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닌이상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추가 무장을 장착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배치시기가 너무 늦었던 탓에 스패드 VII 전투기는 독일군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완벽하게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새롭게 등장하고있는 신형 전투기들에게도 대응해야했기 때문에 200마력으로 강화된 새로운 엔진에 37mm 포를 장착시킨 SPAD S.XII 전투기와 빅커즈 기관총 두 정을 장착한 SPAD S.XIII 전투기를 개발해서 부족한 성능과 화력을 메꾸게 된다. 37mm 포를 지녔던 S.XII 전투기는 조종사가 직접 포를 재장전해야 했기 때문에 일선의 조종사들이 조종하기가 어려워서 소량 생산 되는데 그쳤지만, 기관총이 두 정으로 강화된 S.XIII 전투기는 1차 세계대전 최강의 전투기들 중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단한 성능을 자랑했다. 덕분에, 스패드 VII 전투기는 S.XIII 전투기로 서서히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후방으로 빠진 스패드 VII 전투기들은 훈련용으로 쓰이거나 전쟁이 끝난 후에 민간 조종사들의 비행면허를 따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비록, S.XIII 전투기로 완전히 대치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더욱 강력해진 엔진 덕분에 기동성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전투기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질 수 있어서(기동성이 좋아지긴 했지만 동시대의 다른 전투기들과 비교하자면 여전히 둔한 편이었다), 전쟁 말기에 등장한 독일 공군의 Fokker D.VII 전투기 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게 가능했었다. 기동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불리했지만,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거리를 벌리고있다가 독일기들이 방심한 틈을타서 잽싸게 날아와 공격한 뒤 그대로 이탈해버리는 프랑스군의 공격에 독일기들은 속수 무책이었고, 두 정으로 강화된 무장 덕분에 화력도 더욱 강해져서 이전보다 적기를 격추시키기가 더 쉬워졌었다. (정찰 기구를 효과적으로 격추시키고자 소이탄이 정비된 11mm 구경의 빅커즈 기관총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 공군은 S.XIII 전투기로 독일군이 점령한 제공권을 천천히 장악해 나갔으며, 독일 최고의 전투기로 평가받는 Fokker D.VIIF 전투기와도 견줄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프랑스 공군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스패드 전투기를 주력으로 운용했다.

전쟁에 뒤늦게 참전한 미국은 스패드의 물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뉴포르 28 전투기를 운용했지만, 스패드 S.XIII 전투기의 물량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자 재빨리 스패드 전투기로 대체시켜서 주력기로 운용했다. 휴전협정 때까지 미 육군 항공대는 893대의 스패드 S.XIII 전투기를 운용했으며, 서부전선에 전개된 총 16개의 비행중대 중에서 15개의 비행대대가 스패드 전투기를 주력으로 운용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인 1920년에도 미 육군 항공대는 도입한 수량의 반정도 되는 스패드 전투기를 여전히 운용했고, 전후에는 이스파노-수이자 엔진보다 신뢰성이 높았던 180마력의 라이트-이수파노(Wright-Hispano) 엔진을 몇몇 스패드 전투기들에게 장착해서 운용했다.

전장에서 검증된 뛰어난 성능 덕분에 전후에 스패드 S.XIII 전투기를 운용한 국가들은 굉장히 많다. 일본과 폴란드, 그리고 체코슬라바키아에서 운용되었으며, 무척이나 다양한 국가에서 운용된 전투기인 만큼, 스패드 전투기를 타고 에이스가 된 조종사들의 국적또한 굉장히 다양하다. 스패드 전투기의 에이스 조종사들로는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르네 퐁크와 조르쥬 기느메르가 있고, 미국에는 에디 리켄베커와 프랑크 루크, 이탈리아에는 프란체스코 바라카가 있는 등 이외에도 수많은 에이스 조종사들을 배출시켰다.

이탈리아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였던 프란체스코 바라카의 스패드 전투기를 묘사한 항공화.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수 옆면에 그려져있는 말 그림이 낯설지 않을텐데, 바로 엔초 페라리의 엠블램 마크에 그러져있는 그 말 그림이 맞다. 프란체스코 바라카는 이 껑충대는 말 그림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며 자신이 사용했던 항공기에 그려 넣었다고 하며, 총 34대의 격추기록을 달성했지만 아쉽게도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18년 6월 19일에 격추되는 바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탈리에서 운용된 전투기들은 날개 아랫 면을 이탈리아의 국기 색으로 칠하는 멋스러움도 있었다.)

르네 퐁크 (René Fonck)

독일에 붉은남작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르네 퐁크가 있었고, 영국에는 빌리 비숍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종전까지 르네 퐁크는 붉은남작 보다 5대 적은 75대 격추기록을 달성했지만, 실력만으로만 따지자면 붉은 남작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조종사였을지도 모른다.

르네 퐁크의 전투 스타일은 상당히 냉철하기로 유명했었다.
여느 에이스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퐁크는 다른 조종사들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있는 적기들을 잘 발견한 덕분에 항상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고, 놀랍도록 뛰어난 예측사격 실력을 지닌데다가, 항공기에 관한 기계적인 지식이 뛰어났던 덕분에 자신의 기체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퐁크는 적기의 꼬리를 잡고자 정신없이 선회하면서 싸우는 근접 전투 방식 보다는, 스패드 전투기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전투 방식을 즐겨사용했는데, 높은 고도를 유지한 채 적기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스패드 전투기의 빠른 속도로 단숨에 달려들어서 짧고도 정확한 예측 사격을 가해 적기를 단번에 격추시켰다고 한다.

르네 퐁크가 붉은 남작을 뛰어넘는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로 평가받기도 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정말인가 싶을 정도로 믿기 힘든 사격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인데, 5발의 짧은 기관총 사격만으로 적기를 격추시키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속도가 비교적 느렸던 1차 세계대전의 항공기들이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시속 100 킬로미터에서 200 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속도로 교전했었기 때문에 적기를 명중 시키려면 적기의 예상 비행경로 앞으로 사격을 가해야만 정확한 명중타를 날릴 수 있었고, 무수한 탄환을 명중시켰다 하더라도 엔진과 조종사를 맞추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탄알들은 그저 나무나 천으로 이루어진 항공기의 표면을 뚫고 지나갈 뿐이어서 하나의 적기를 격추시키려면 수백발의 탄환을 퍼부어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었다. 때문에 르네 퐁크의 예측사격 정확도는 정말 기가막힐 정도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뛰어난 사격실력 덕분에 르네 퐁크는 운용하기 불편하다는 평가를 받아 소수만 생산되는데 그쳤던 스패드 S.XII 전투기로 여러 격추 전과를 일구어내기도 했었다. 스패드 S.12 전투기에는 37mm 포와 7.7mm 빅커즈 기관총이 장착된 덕분에 1차대전 전투기들 중 가장 강력한 화력을 지녔던 전투기였지만, 37mm 포의 탄환은 탄속이 느렸기 때문에 적기를 맞춘다는건 거의 운에 가까운 일이었고, 한 발 쏘고 나서는 조종사가 항공기를 조종하면서 포의 재장전 과정을 직접 거쳐야했기 때문에 제대로 운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었다. 적기의 뒤를 물기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상황을 판단해야하는 조종사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강한 쓸모없는 무장이었던 것인데, 르네 퐁크는 S.12 전투기에 장착된 37mm 포를 이용해 총 11대의 독일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초인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운용하기 힘든 무장이었던 만큼, 2인승 항공기들을 상대로 격추 전과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5분만에 세 대의 정찰기를 격추시킨 르네 퐁크.
퐁크의 놀랍도록 정확한 예측 사격실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안개가 잔뜩 끼어있던 1918년 5월 9일에는, 후세에 길이 남을만한 경이로운 격추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이 날 퐁크는 짙은 안개 때문에 하루종일 지상에 발이 묶여있었지만, 오후에 날씨가 개이자 15시 00분 정각에 이륙해서 홀로 초계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모하이유(Moreuil) 남쪽에서 비행중인 세 대의 독일군 정찰기를 발견하곤 그대로 공격해서 16시 00분에서 16시 05분이라는 짧은 시간안에 세 대의 정찰기를 모두 격추시키는 믿기 힘든 격추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각각 16시 00분, 16시 02분, 16시 05분) 그리고 두 시간 뒤, 정찰기가 수행하는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던 퐁크는 프랑스군에게 곧 포화가 쏟아질거라 예상하고 포격을 유도해줄 다른 독일 정찰기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18시 20분 부터 하나씩 날아오는 정찰기들을 모두 격추시킨 덕분에 세 대의 정찰기를 추가로 더 격추시켜서 3시간 동안 여섯 대의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각각 18시 20분, 18시 55분, 18시 56분!!)

르네 퐁크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또다른 특이점으로는, 순간적인 사격으로 적기를 격추시켰다 보니 다른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격추 기록을 공유하는 사례가 단 세 번 뿐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에이스 조종사들이 한두 번쯤은 부상을 입거나 결국에는 죽었던 반면, 르네 퐁크는 부상을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죽지도 않았다. 퐁크가 교전중 입었던 피해는 오직 단 한 발의 총알이 퐁크가 조종하던 스패드 전투기에 박혔던 일 뿐이었다. (르네 퐁크가 얼마나 냉철하게 전투에 임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다른 조종사들과 달리 관측 기구를 한 번도 격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르네 퐁크가 달성한 모든 격추기록은 전부 항공기로 이루어져있다.

관측 기구는 고정된 목표물인데다가 불타오르기도 쉬웠던 표적이었기 때문에 항공기에 비해서 격추시키는게 상대적으로 쉬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적 항공기들과 대공포들이 관측 기구를 집중적으로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찰기구를 공격하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임무에 속했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납탄으로는 관측 기구안에 가득찬 수소를 발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탄환을 퍼붓는다 하더라도 구멍만 나기 일쑤여서 당시에는 관측 기구를 격추시키는 것 만으로도 항공기를 격추시킨 것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대전 말기에는 대기구용 기관총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스패드 S.XIII 전투기로도 손쉽게 격추시킬 수 있었지만, 퐁크는 오로지 적 항공기들만 상대했었다. (어쩌면, 기구 격추 임무 자체가 자원자를 받아서 수행해야했을 정도로 위험한 임무였기에, 이 임무 자체를 기피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독일의 붉은 남작처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조르쥬 기느메르나 다른 에이스 조종사들과 달리, 르네 퐁크는 굉장히 내성적이었기에 절제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때문에 다른 조종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거나 놀기 보다는 다음 임무에 대한 전술 계획을 짜거나 제복을 다림질했다고하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체조활동 등으로 일과를 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인지, 자신의 수줍은 성격에 대해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끊임 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 놓았다고 하며 이런 행동들로 인해서 퐁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르네 퐁크를 그저 거만한데다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퐁크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가질 수 있었던 프랑스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적은 편이었고, 대중에게도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케이스로 남아있다.
비록, 인기는 없었지만, 르네 퐁크는 당시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조르쥬 기느메르를 뛰어넘어서 프랑스 최고의 격추 기록을 달성했으며, 1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에이스 조종사들 중에서도 붉은 남작 다음으로 많은 격추수를 보유한 연합군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로 기록되고 있다.

르네 퐁크가 받은 훈장들은 다음과 같다.

– Medaille Militaire : 무공훈장

– Legion d’Honneur : 레종도뇌르 훈장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

– Officier de la Legion d’Honneur : 레종도뇌르 2등 훈장

– Military Cross : 무공 십자훈장 (세계 대전 초기 영국에서 제정)

– Distinguished Conduct Medal : 청동 수훈 십자장

르네 퐁크가 사용한 스패드 전투기의 도색.